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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매괴 성모 순례지 - 성모님께 봉헌된 어머니 성당
![]() sisaview DB /루르드의 성모 재현 동굴 사진=감곡성당 임 가밀로 신부가 성모님께 기도하여 마련된 성당 임 마밀로 신부가 일제 신사터가 되려할 뻔 한 곳을 기도로 지킨 곳 인민군이 사령부로 사용할 때 성모상에 쏜 총알 피해 가 많은 치유의 기적이 있는 성당
위치: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357-2 성당 전화번호: 043) 881-2808~9 [시사뷰타임즈] 19일 목요일, 매괴 성모 순례지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30분 쯤이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사진도 찍은 후 본당에 들어갔는데 20여명이 채 못되는 신자들이 제대를 바라 보며 여기 저기 듬성듬성 앉아있기에 평일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고, 그냥 성당에 앉아 묵상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순례’차 이곳 성당을 찾은 것인데, 작지만 성의를 봉헌하겠다고 어느 중년의 여자 신자에게 어느 곳에 놓으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렇게 한 뒤 바로 나가려했더니 이 여 신자분이 “2시에 신부님이 성체강복을 하니 그것을 받고 가시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5분 전 2시였다. 시간을 맞춰 신자 몇 명이 더 들어오고 신부의 기도가 시작됐는데, 모든 성당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매괴 성당에서 작성한 자체 기도문이었다. 신부가 한 구절을 읽으면, 신자들이 신부가 읽은 구절을 다시 한 번 따라서 읽는 형태였다. 그리고 나서, 성체 강복이 있었다. 성체 강복을 마친 젊은 신부는 “안녕히들 돌아가시라”며 성당에서 나왔는데, 그 신부에게 봉투를 전하며 부탁했다. 본당 사진을 외부에서 찍으려 할 때 신부가 성당이 커서 제대로 나오지를 않을테니, 성당 바로 앞쪽에 내려 가는 계단을 내려가서 찍으면 잘 나올 것이라고 친절히 안내까지 해주어 신부가 시키는 대로 사진을 찍고 왔는데, 대단히 아쉬운 것은 공부를 제대로 하고 가지를 않아 루르드 동굴의 성모님을 그대로 재현하여 만든 성모광장은 가 보지도 못하고 왔다는 점이다. ............. 감곡성당이 처음부터 성모님께 봉헌되고 매괴성모순례성당이 된 사연 감곡본당은 1896년에 설립되어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초대 본당 신부였던 임 가밀로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93년 서품 받은 후 바로 입국하여 그 다음해인 1894년 첫 본당으로 유서깊은 교우촌이자 신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본당 사목지가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산지 부락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하던 중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의 대궐같은 집을 보고 이곳이 본당 사목지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즉시 임 가밀로 신부는 “성모님, 만일 저 대궐같은 집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수호성인)가 매괴(玫瑰; 해당화 구슬: 즉 묵주기도)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였으며 부엉골로 돌아가서 끊임없이 청하였다. 당시 대궐같은 집은 명성왕후 6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고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가 피신왔던 곳이기도 하다. 성모님께 기도한 후로부터 1년 4개월 만에 그리고 우연하게도 1895년5월 성모 성월에 그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 묵주기도 어머니의 축일인 10월7일 본당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결국 임 가밀로 신부가 처음에 기도한 대로 감곡본당을 성모님께 봉헌하여 이곳이 감곡매괴성모순례성당이 된 것이다. 감곡성당 “감곡매괴성모순례성당은 늘 성모님께서 함께 하시며 성모님 본연의 역할인 전구하심이 크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성모광장 1943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사를 지으려고 터를 닦자 임 가밀로 신부가 무임시태(無染始胎: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었음을 뜻하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기적의 패를 묻어두고 “이 공사를 중단하게 해 주시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공사중 여러 기상이변(천둥, 소나기, 벼락)으로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2년 뒤 해방이 되어 일본인들이 물러가게 된다. 신사터가 될 뻔했던 곳이 1955년8월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성모광장으로 봉헌되었고 2018년 감곡 성체현양대회를 맞이하여 성모광장을 확장하고 루르드 마사비엘 성모발현동굴과 동일한 형태와 동일한 크기의 성모동굴을 봉헌하였다. 지방 최조의 성체신심행사 성체거동 감곡매괴성모순례성당의 성체거동은 지방에서 거행되는 최초의 성체신심행사였다. 성모님 사랑을 바탕으로 신앙의 기초를 놓았고 우리 신앙의 핵심은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이시며 성체성사가 신앙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을 깊이 심어주기 위해 1914년부터 한국 최초의 성체신심행사인 성체거동을 거행하였다. 1914년 성체성혈 대축일 이래 전쟁 등의 어려운 시기를 제외하고매년 거행되고 있다. 이 행사는 매년 10월 첫 주 목요일, 성대한 사제단의 행렬로 시작하여 미사와 함께 성체강복으로 끝나게 된다. 성체신심에 대한 중요한 신심행사는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성체신심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체공경을 표현하는 신심행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수난맏은 매괴 성모님 매괴 성모님은 루르드에서 제작하여 1930년 대성전 건립 당시 제대 중앙에 안치 되었다. 한국 전쟁 때 성당은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됐는데 인민군이 성당안에서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을 겪자 그 원인이 성모상이라 생각하고 총을 쏘았다. 그러나 7발을 맞고도 성모상이 부서지지 않자 기관단총으로 사격을 했으나 총알이 피해갔다. 그래서 성모님을 끌어내리려고 올라갔을 때 성모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인민군들은 성모상을 건드릴 수 없었고 그때부터 성당에서 철수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 이 성당은 ‘칠고의 어머니’ 또는 ‘매괴의 어머니’라고 불렸으며 성모님상 앞에서 또는 이콘 앞에서 많은 이들이 기도하여 외적 내적 치유를 받고 있다. ‘ 임 가밀로 신부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51년 동안 감곡성당에서 사목생활을 하셨던 임 가밀로 신부는 1947년10월5일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소에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잘 말해준다. 임 가밀로 신부는 프랑스 타르브 교구 빌레아두르라는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루르드에서 20km 떨어진 곳으로 어렸을 때부터 엄마 손을 잡고 정기적으로 루르드를 찾아가 루르드의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성장했는 것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앙의 못자리, 성소의 못자리, 매괴성모순례지 감곡매괴성모순례성당은 처음부터 성모님께 봉헌된 어머니 성당이다. 성모님 사랑과 성체 신심을 바탕으로 신앙의 못자리이며 성소의 못자리이다. 150여 명의 성직자, 수도자를 배출한 곳으로 임 가밀로 신부를 통해 성모님 사랑의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 감곡매괴성모순례성당은 감곡본당 신자들만의 순례지가 아닌 모든 신자들의 순례지로서 성모님의 사랑과 신앙을 체험할 수 있는 매괴성모순례지와 기도의 순례지로 감곡성당이 광범위한 사목 중심지로서의 역할과 결실, 역사에 드러난 하느님 은총의 여러 가지 표징들, 오랫동안 꾸준히 증가하는 많은 신자들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순례 등을 숙고한 끝에 지난 2006년10월7일 청주 교구장 가브리엘 장봉훈 주교의 주례로 ‘감곡매괴성모순례성당’으로 승인하고 공식적인 선포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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