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0.15.
성치 위치: 충남 홍성군 홍성읍 이문길 37-1
[시사뷰타임즈] 현재 홍주라는 지명은 없다. 홍주와 결성이 합해져 홍성이 됐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홍성나들목을 나와 29번 국도를 타고 홍성 방면으로 약 11㎞를 달리면 홍주성 역사공원에 도착한다. 성곽 810여 m와 건물 6동만 남아있는 이곳이 바로 홍주 순교성지다. 하지만 처음 찾는 사람들은 이곳을 성지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잘 꾸며진 솔뫼성지나 해미 순교성지와 달리 홍주성 안은 군청과 읍사무소, 상가 등이 있어 우리네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가톨릭 평화신문]
이렇게 지명의 변천은 있었지만, 그래도 대표적으로 불리는 명칭은 ‘홍주 순교성지’이다.
이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홍성에 도착을 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한 건물 가게 자리 정도 크기로 있는 작은 성당의 ‘홍주성지성당’이라는 간판이 보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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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성당이 아니고 홍주 순교 성지 안내소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규모가 일반 가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어가 보면, 제대가 있고 예수 십자가 상이 있으며 플래스틱 의자들이 몇 십개 놓여있다.

훌륭한 강론을 펼치는 최교성(요한) 신부 [SISAVIEW DB]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성지들은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있다. 순교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 속 등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있다가 순교를 했기 때문에 이분들을 기리는 성지는, 차도에서 내려 때론 한참을 걸어 들어가거나 산속길을 걸어올라가면 비로소 성지가 있다.
이런 선입견을 안고 홍주성지성당을 보면서, “이곳이 홍주 성지입니까?”라는 질문을 홍주 순교 성지 관계자들에게 하게 되는데, 이 질문에 관계자들은 “아닙니다. 홍주 전체가 순교성지입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그림=가톨릭평화신문]
이곳에 찾아온 신자들은 작은 홍주성지성당에서 일단 미사를 드리고 대개는 오전 9시 정도에 이곳으로 출발을 했기에 미사를 드리고 나면 점심 시간이 되고 점심을 먹고 난 뒤, 홍주 전체를 둘러보면서 왜 홍주 전체를 순교 성지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곧 알게 된다.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처벌을 받으러 가는 순교자 분들에게 길거리에 있는 상인들이 먹을 것 하나라도 주려고 했다는 ‘저자거리’, 순교자들의 목을 치다 보면 솟구치는 피 때문에 하천 바로 옆에서 참수를 했다는 ‘참수지’, 그리고 땅을 파고 일가족을 이 구덩이 속에 넣은 뒤, 모래를 한 삽 한 삽 퍼부어 넣어 죽게했지만, 그 일가족은 기뻐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생매장터’
등등을 이 성지 관계자의 해설을 들으며 한 곳 한 곳 걸어 돌아다니면서 보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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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당시 가혹한 고문을 살점이 떨어지고 찢어진 순교자분들이 지하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시고 몸에 뿌리면 죽을 상처인데도 다시 잘 아물어 신비한 샘으로 불렸다는 곳에도 가게 되는데, 홍주성지성당에서 이 물을 그대로 치표 밖으로 올라오게 하기 위해 여러 곳에 시추를 부탁했으나 뚫는 곳마다 ‘수질 불합격’판정을 받았고, 그럼 마지막으로 한번 더 시추룰 해보자고 열 두 서너 번째 시추한 끝에 드디어 수질 합격을 받았다는 지하 130m 이하에서 자연적으로 솟구쳐 수도꼭지 여러 개를 통해 나오고 있는 물을 받아갈 사람은 받아가라고 작은 플래스틱 병 하나를 성당 측에서 나누어 준다. 물이 깨끗하고 물맛이 대단히 좋다.
이 물을 마시고 충전되어 과거 순교자분들이 엎드려 곤장을 맞고 갇혀있었던 감옥에 들어보면, 죄수를 감시하는 관리 모형 둘이 서있고 옥 안에서 칼을 쓴 채 앉아있는 모형 그리고 발에 나무 족쇄를 한 채 두 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게 된 채 서있는 모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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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마지막 단계로 순교자분들이 심판을 받았다는 ‘홍주아문’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곳으로 들어가보게 되는데 이 당시의 관아터 밖 그리고 안에는 수령 몇 백년 된 느티나무들이 서있는데, 사함 두 세명이 두 팔을 벌리고 끌어안아야 될 둘레를 가진 우람하고 위엄이 있는 나무들이다.
이렇게 순교 발걸음을 마치면서 드는 느낌은 홍주라는 마을 자체를 보면서 건물, 상가, 도로, 자동차 그리고 행인들을 다른 여느 곳과 똑같이 보면서 이곳 전제가 성지라는 사실이 새삼 생동감있게 느껴지고 이 마을 전체게 성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13>홍성 홍주순교성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일상에서 느끼는 순교자 숨결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는데, 바로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
2014. 09. 07발행 [1281호]
여기서 말하는 가야산 앞뒤의 열 고을은 홍주ㆍ결성ㆍ해미ㆍ서산ㆍ태안ㆍ덕산ㆍ예산ㆍ신창ㆍ면천ㆍ당진 등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설명대로 내포 지방은 지형상 바다와 가까워 곳곳에 뱃길이 발달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내포는 외래문화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내포 지방이 천주학을 빠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해 신앙의 못자리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중에서도 홍주는 충청도 최초 순교자의 치명 터이자, 병인박해 때까지 순교자 212명이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잃은 곳이다.
8월 16일 복자 반열에 오른 원시장(베드로, 1732~1793)ㆍ방 프란치스코(?~1799)ㆍ박취득(라우렌시오 1769~1799)ㆍ황일광(시몬, 1757~1802)이 바로 이곳에서 거룩한 피를 흘리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현재 홍주라는 지명은 없다. 홍주와 결성이 합해져 홍성이 됐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홍성나들목을 나와 29번 국도를 타고 홍성 방면으로 약 11㎞를 달리면 홍주성 역사공원에 도착한다. 성곽 810여 m와 건물 6동만 남아있는 이곳이 바로 홍주 순교성지다. 하지만 처음 찾는 사람들은 이곳을 성지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잘 꾸며진 솔뫼성지나 해미 순교성지와 달리 홍주성 안은 군청과 읍사무소, 상가 등이 있어 우리네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우리가 살며 숨 쉬고 걷는 자리가 모두 순교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주 순교성지를 찾는 순례객들은 “신부님, 이스라엘 성지를 걷는 기분이에요!”라며 감탄하기 일쑤다.
다른 내포 지방 성지에 비하면 적은 수지만, 홍주 순교성지를 찾는 순례객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서울 용산역에서 홍성역까지 약 2시간, 홍성역에서 성지까지 도보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열차순례로 찾아오는 다른 지역 신자들도 꽤 많은 편이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회사적 의미를 높이 산 홍성군은 홍주성 일대를 순교역사공원으로 꾸미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홍성군에서 마련한 ‘천주교 순례길’은 순교사적 의미가 큰 저잣거리ㆍ진영장ㆍ안회당(동헌)ㆍ감옥터ㆍ참수터ㆍ생매장터 등 6곳을 둘러볼 수 있는 짜임새를 갖췄다. 그 길을 따라 복자 4명의 순교 여정을 시작한다.
숨김없이,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하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읍민들의 보호로 살아남은 홍주성의 동문, 조양문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당시 교우들은 체포된 후 이 문을 통해 홍주성으로 들어왔다. 들어서자마자 이들을 맞는 곳은 진영장. 조선 시대 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다. 지금은 통신회사 건물이 들어섰다. 바로 이 자리에서 천주교를 믿느냐는 질문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안회당으로 보내져 본격적 심문을 받았다.
안회당으로 가는 길목은 저잣거리였다. 20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길목에는 상점이 줄지어 있다. 순교자들이 걷던 길을 걷자, 순교자들을 향해 침을 뱉거나 욕하던 저잣거리 사람들이 상상됐다.
홍주 아문을 정문처럼 두고 있는 홍성군청 건물 뒤편에 안회당이 있다. 순교자들이 문초를 겪던 곳이다. 이곳에서 복자 박취득은 1400대 넘게 매를 맞았고, 황일광도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으스러질 정도로 잔인하게 매질을 당했다.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안회당 뒤뜰에는 순교자들의 피를 머금은 땅에서 붉은 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두 번째 천국을 기쁘게 받아들이다
안회당에서 약 800m 떨어진 곳에 감옥이 있다. 모진 문초를 받고도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복자 원시장ㆍ방 프란치스코ㆍ박취득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원시장은 이 감옥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얼어 죽게 하는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감옥 옆에는 우물 복원 공사가 한창인데, 원시장이 바로 이 우물물을 뒤집어쓰고 목숨을 잃었다. 홍주성에서 약물로 유명했던 우물물은 고문을 받다 정신을 잃은 순교자들을 깨우는 용도로 사용됐다고 한다. 얼마 후면 우물은 긴 잠에서 깨어난다. 과연 우물은 그때의 비명을 기억하고 있을까.
조양문 밖에는 월계천이 흐른다. 그리고 월계천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복자 황일광의 목이 잘린 곳이다. 백정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인간적 애덕을 느낀 그는 자신에게 천국은 이 세상과 후세 두 곳이라며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진술에는 이미 두 번째 천국을 맞이하는 기쁨이 담겨 있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지점, 모래가 쌓인다. 바로 이곳이 생매장터다. 모래는 파기도, 묻기도 쉬워 이곳에 홍주성 안에서 순교한 이들의 시신 또한 묻었다고 한다. 바로 옆 야외 성전에서 생매장터를 내려다보면 자연스레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앙을 되새기게 된다.
그 자체로 순교 영성이 느껴지는 곳
홍주 순교성지 성당을 찾기는 쉽지 않다. 홍주 순교성지가 여느 순교지 같지 않은 데다 성당 건물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현재는 옥터 앞 작은 상가 건물에서 임대한 82.645㎡(25평) 공간을 성전으로 꾸며 화~토요일 오전 11시 미사를 봉헌한다. 문의: 041-633-2402
홍주 순교성지 전담 최교성 신부는 “홍주성을 인위적으로 꾸밀 생각은 없다. 있는 그대로가 성지이기 때문”이라면서 “대신 순례객들이 순교 영성을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야외에 대형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만 조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최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방한 이후 충청도와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며 “단체 순례객들이 함께 파견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정도의 성당 또한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홍주 순교성지는 주변 솔뫼와 해미 순교성지에 비해 덜 알려졌다. 하지만 증거터 세 곳과 순교터 세 곳에서 느껴지는 순교자들의 신앙심은 여느 성지 못지 않게 짙다.
글·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가톨릭 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