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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등반객들을 허락하지 않는 히멀레이어 (히말라야) 봉우리
![]() ![]() 공식적으로 2012년에 개장한 5일짜리 마르디 히말 도보산악여정은 마차푸차레의 눈을 떼기가 어려운 전망을 제공해 준다. (Credit: Neelima Vallangi)가파르게 수직으로 크게 융기한 면이면서 두드러진 삼각형 모습을 갖춘 채, 마차푸차레는 안나푸르나 산줄기에 있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봉우리들 중 하나다. (Credit: Neelima Vallangi) 마차푸차레를 등반하는 것은 금지돼 있는데, 산악 관광업을 너무도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조차도 과밀 상태인 네팔 같은 나라에선 희귀한 일이다
BBC 원문 2021.2.17. [시사뷰타임즈] 어느 여름 버스 창문을 통해, 난 짧은 순간 동안 빙빙 돌며 소용돌이치는 구름에 가리워져 있고 네팔의 유명한 포크하라 계곡과 동일한 명칭의 도시 위로 우뚝 솟은 채, 바위와 눈이 섞여있는 거대한 삼각형 덩어리의 희미한 윤곽에 감명을 받으며 놀라워했던 것을 기억한다. 북적대는 작은 도시의 하늘선을 장악하고 있는 인상적인 봉우리를 보는 것은 인도 쪽에서나 네팔 쪽에서나 내가 10년 동안 히멀레이어 (히말라야)를 탐험하면서 처음에 힐끗 히멀레이어 산을봤었던 경험들 중 그 어느 것과도 다른 것이었다. 난 아주 재미가 붙어서 어디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잠시 보겠다고 며칠 동안 걸어다닐 필요가 없었고. 그저 버스 속에 앉아있어야 했다. 무심코 내 상상력을 사로잡은 산은 에버레슷 (에베레스트) 도 아니고 이 나라의 8,000m가 넘는 다른 산 7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낮으며 아름다움을 볼 때 높이는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산이었다. 세상을 돌아보니, (이 산에) 집착하고 있는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나에 앞서 몇 십년 전에도, 또 다른 사람도 이 산과 사랑에 빠졌었고 - 그리고 차라리 변덕스러운 유산으로 뒤에 남겨 놓았었다. 마차푸차레 -번역하면 “생선 꼬리처럼 갈라져 있는”- 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10곳 중 3곳이 있는 네팔 중심부의 안나푸르나 산맥에 위치한 높이 6,993m의 상징적인 산이다. 그리고 아직, 마차푸차레는 안나푸르나 산맥에 있는 자기보다 훨씬 더 높은 봉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덕분에 관심을 독차지하는데, 마차푸차레는 안나푸르나 산맥에 따로 고립돼 있기에 보잘 것 없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높아 보인다. 이 산 봉우리의 지형학적 위치가 몇 몇 장소에서도 이 산의 다른 전망을 쉽게 보게 해주며, 놀랍게 두드러진 이 산의 수직으로 융기한 면적은 그 어떤 각도 또는 그 어떤 먼거리에서도 볼 수 있다. 쌍둥이 첨탑이 서로 비틀어져 있는 것처럼 솟아있기에, 마차추차레의 겹 정상은에는 날카로운 산등성이가 합체돼 있기에 카파르고 대칭적인 삼각형 끝 만큼이나 매력이 있는데 - 이것도 이 산의 다른 모습이다. 처음애 이 광경을 본 뒤, 난 몇 차례 네팔로 되돌아 갔고 항상 시간을 내어 내가 좋아하는 산을 보았다. 마차푸차레가 페와 호수에 비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으면서 며칠을 보냈다. 나머지 날들에는 이른 오전 및 늦은 저녁에 대양이 베그나스 호수 주위의 교외 언덕들 위로 솟아있는 뾰족한 봉우리에 비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햋빛을 보면서 보내게 됐다. 어느 며칠 동안, 난 포크하레 계곡 주위에 있는 사랑고트 또는 아스탐 산등성이 위에서 마차푸차레 산을 물끄러미 바라봤었다. 세상을 보니, 이 산에 집착하는 건 나 뿐 만이 아니었다 어느 겨울, 난 마침내 마차푸차레 밑에 있으며 마르디 히말이라고 불리는 작은 봉우리 등산 기지로 걸어 올라갔다. 2012년에 행한 등정에서 5일로 잡은 짧은 기간에 40km를 걸어서 높이 4,500m에 당도해 보니 마차푸차레의 가장 맑고 가장 가까운 전망들 중 하나를 내어 준다. 추가로 1,000m를 더 마르디 히말 정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누구라도 가장 가깝게 정상에 갈 수 있다. 이것에 마차푸차레 등반을 금지하는 이유인데, 산악 등반업을 어무도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점 -8,848m인 에버레슷 산 정상- 조차도 과밀 상태인 네팔 같은 나라에선 희귀한 일이다. 그러나 마차푸차레가 처녀봉으로 남아있는 이유 -상업적인 산악 도보여정 및 등반이 오늘날 네팔에서 폭발적임은 물론이고- 는 한 남자 때문일 수 있는바: 제임스 오웬 메리온 라버츠 중령 (1916-1997) 이 그 사람이다. 대중들에 의해 알려진 대로, 라버츠는 유명한 영국 육군 장교였으며 그의 네팔 및 히멀레이어 등반에 대한 기여도는 심오하다. 라버츠는 1958년 최초로 네팔 군 담당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자신의 지위, 열정 그리고 히멀레이어에 대한 지식 등을 활용하여 네팔 오지의 산들을 상업적으로 등반하고 도보산악여행을 할 문을 열었는데, 이것은 네팔의 경제 및 현지인들의 생계에 상당한 기여를 해오고 있는 하나의 산업이 됐다. 그는 히멀레이어 탐험 황금시대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곳에서 이 산의 아름다음을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고, 이때 네팔 최초의 ‘산악 여행’ 이라고 불리는 도보산악여행국을 1934년에 설립했다. 그는 “산악도보여행” 이라는 용어까지 선정하여 대중화시켰는데, 오늘날 히멀레이어 산맥에선 “산길도보여행” 과 동의어가 됐다.라버츠가 포크하라와 마차푸차레에 매력을 느낀 것운 한 육군 장교가 쓰고 네팔이 펴낸 특전을 읽은 뒤 시작된 것이었는데, 이 육군 장교는 이 산과 호수 둑에 잇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을에 대해 글을 썼었다. “포크하라와 마차푸차레 [당시 육군 장교가 쓴 것 그대로 임] 와 우리 사병들이 사는 마을, 그리고 특히 구룽스 -히멀레이어 산맥에 있는 주요 구르크하 부족들 중 하나- 를 보면 곧 집착에 빠지게 된다.” 고 적었었다. 라버츠는 윌프릿 노이스가 쓴 ‘비행기 꼬리 날개를 등반하는 것’ 이라는 책 서문에 “그러나 그 시절, 네팔 내부는 금단의 나라였고 전성기 때의 메카 또는 라사 (주: 티벳의 수도, 라마교의 성도(聖都)) 보다도 더욱 단단하게 닫혀있었다.” 고 적어 넣었다. 라버츠가 포크하라와 마차푸차레에 매력을 느낀 것운 한 육군 장교가 쓰고 네팔이 펴낸 특전을 읽은 뒤 시작된 것이었는데, 이 육군 장교는 이 산과 호수 둑에 잇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을에 대해 글을 썼었다. “포크하라와 마차푸차레 [당시 육군 장교가 쓴 것 그대로 임] 와 우리 사병들이 사는 마을, 그리고 특히 구룽스 -히멀레이어 산맥에 있는 주요 구르크하 부족들 중 하나- 를 보면 곧 집착에 빠지게 된다.” 고 적었었다. 라버츠는 윌프릿 노이스가 쓴 ‘비행기 꼬리 날개를 등반하는 것’ 이라는 책 서문에 “그러나 그 시절, 네팔 내부는 금단의 나라였고 전성기 때의 메카 또는 라사 (주: 티벳의 수도, 라마교의 성도(聖都)) 보다도 더욱 단단하게 닫혀있었다.” 고 적어 넣었다. 1950년, 라버츠는 마침내 자신이 사랑하는 산을 가까운 지역에서 봤다. 라버츠는 자신의 이 중요한 만남에 대해 “난 나의 개인적인 메카 (포크하라) 에 들어온 최초의 영국인이었다. 이곳엔 달빛에 빛나는 마차푸차레가 있었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담한 거대한 흰색 피러밋 (피라미드) 였다” 라고 적으면서 “그리하여 마차푸차레는 내게 있어선 이상적인 산, 아예 이 세상에서 끄집어낸 개인적 소유물, 비논리적인 권한으로 취득할 수는 없지만 내것인 것, 나의 남은 여생의 모습을 형성해 줄 나라와 국민을 품는 것 등이 됐다.” 고 했다. 마차푸차레에 정착한지 20년도 더 지난 후인 1957년, 이 산 정상을 정복할 최초의 원정대를 조직했는데 (노이스가 이끌고 다른 등산인 몇 명이 합류), 그 이후 공식적으로 등반한 일이 없었다. 노이스의 이 산 등반에 대한 설명 중 두드러지는 것 하나는 라버츠가 자신의 정상정복에 대한 꿈을 쉽게 내려놓았지만 그때 병창문제가 이 정상정복을 위한 등반대를 둘로 나눠지게 했다. 라버츠는 이 등반대가 내려가는 것을 자원하여 지원했지만 반면 노이스와 또 다른 등반인은 정상을 향해 마지막 박차를 가하며 앞서갔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면서 끝냈는데, 불과 정상 45m를 남겨두고 악천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원정 시도 이후, 라버츠는 말하자면 자기답지 않다고 해야할 요청을 네팔 정부에 했는데: 봉우리를 제한하고 그리하여 마차푸차레라는 히멀레이어 정상을 영원히 등반되지 않은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놀랍게도, 네팔 정부 사람들은 고마워했다. 1974년부터 라버츠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으며 네팔 작가이자 관광 산업 전문직 역전노장인 리사 초엑얄은 내게 “라버츠는 큰 자부심이 있는 등반인은 아닙니다. ”이번 경우만 해도, 자기가 정상에 오를 수 없었으니까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정상에 오르길 원치 않는 좀 약간 자만심에서 한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이 그의 현실 생활에서의 바로 그의 온화한 성격을 대변하는 건 아닙니다.“ 라고 했다. 라버츠는 마차푸차레를 신성한 봉우리로 여기는 구룽스 및 마차푸차레가 정상을 정복해보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특히 기분좋은 곳이 되기 이전의 마지막 남은 구룽 족 마을의 촘롱 사람들과와는 강한 연대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네팔의 몇 몇 공동체에겐 산맥 몇 곳이 신성한 곳이지만, 그리고 그러한 자세가 네팔 정부가 등반 허가증을 발행해주는 것을 막지는 못했고, 라버츠가 다른 산들을 오르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그러나 라버츠가 이례적인 요청을 하도록 이끈 것은 아마도 그의 구룽 민족에 대한 사람 및 이 산에 대해 마법에라도 걸린 듯 한 그의 확고한 자세였을 것이다. 손에 닿을 듯이 애를 태우는 이 산의 금지된 정상, 이래서 더 유혹적 라버츠가 정확히 어떻게 네팔 정부가 동의하도록 만들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네팔 내에서 이 처녀봉 등반은 불법적이라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져 있는 것을 보면, 정서는 잘 반영돼 있는 듯하다. 사실, 라버츠의 접근 금지가 돼 있는 이 봉우리와의 관련성은 대체적으로 잊혀져 있는 상태다. 라처츠의 말년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네팔 당국자들이 이 봉우리가 신성한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내 조헌을 받아들인 것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쯤 해서는 이 산은 신성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식이 됐습니다" 라고 초엑얄은 말했다. 오늘날 이 산은 신성하므로 금지돼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점이다. 시인이자 포르하라에 오래 살아온 주민인 티르타 시레스타는 내게 “마차푸차레의 정상은 발로 밟으라고 있는게 아니죠: 오로지 눈으로 찬미만 받아야 하는 거에요.” 라고 하면서, 현지인들은 마차추파레가 등반을 위해 개장돼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비난 포크하레에 대해서 뿐 아니라, 히멀레이어 산맥들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그 어떤 담론이라도 마차푸차레를 언급하지 않고는 제대로 이어 나갈 수가 없다. 이 산의 아름다움에 시인들, 작가들 그리고 예술인들은 지대하게 감동을 받아왔다. 많은 민속 노래에서도 이 산은 수 많은 찬사를 받아왔으며, 마차푸차레는, 우리들에게 있어선, 아름다움의 완벽한 본보기이다.” 라고 했다. 라버츠나 나나 동의하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 마르디 히말 산악도보여정으로 포르카라 계속 인근에 갔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낮은 언덕에 있는 진달래속 꽃 수풀 한 가운데를 걷고 있는 동안, 안나푸르나 산맹 전경이 보이는 가장 높은 지점으로 가는 내내 상공에는 때때로 구름들이 떠 있었고, 마차푸차레의 뾰족한 산봉우리는 항상 수평선을 지배하며 나를 낮천 노예처럼 붙들었다. 그리고 이 산의 금지된 정상, 손에 닿을 듯 애를 태우는, 스스로를 더욱 유혹적으로 만들었다. 라버츠가 왜 이 봉우리를 영원히 존중돼야 할 곳으로 남길 원했는지는, 특히 한때 자기 자신은 정복하려 했고 매우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으면서, 결코 분명해지지 않게 됐지만, 얼마나 많은 곳들이 과잉관광 및 상업적 등반으로 유린돼왔는지를 보면, 라버츠의 조치에서 흠 잡을 곳을 잡기는 힘들다. 네팔의 다른 많은 산들이 많이 부족한 세입을 창출하는 반면, 말로 형용하기 어렵도록 아름다운 산 하나가, 고독하게 서있는 신성한 봉우리로부터 인간의 손길이나 인간의 똥고집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채, 세상을 지켜보며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차라리 매우 적절한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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